수 행 이야기

다섯째. 묵상관상과 수피즘(Sufism)

자공 우주 2008. 2. 20. 16:10

다섯째. 묵상관상과 수피즘(Sufism)

   

출처 : 정신과학 학회지/한 박석 교수 

하나의 종교에는 그 종교의 성격을 규정짓는 경전, 교리, 의식 등의 외적 틀과 아울러 그 종교의 힘을 유지시켜 주는 내적 수행법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아무리 좋은 경전, 완벽한 교리, 장엄한 의식이 있어도 내면적 힘이 없는 종교는 오래 갈 수 없다. 수행은 의식을 고양시키고 믿음을 더욱 심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 종교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매우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묵상관상은 기독교의 신비주의 수행법이고,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법이다. 먼저 묵상관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묵상은 관상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묵상에도 두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추리 묵상이고 하나는 감성 묵상이다. 초기에는 주로 추리 묵상을 많이 하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감성 묵상으로 

넘어간다. 추리 묵상은 주로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묵상을 하지만 이것이 점점 깊어지면 이성이나 상상력은 점점 사라지고 묵상의 주제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감성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 단계가 바로 감성 묵상의 단계이다. 추리 묵상에서 감성 묵상으로 나아가면 이성적인 사유나 추리 활동은 점점 정화되어 감성적인 느낌이 주로 활동한다. 이 단계에서는 감사, 기쁨, 경탄, 봉헌, 사랑 등의 감성적인 활동이 수행자의 가슴에 넘쳐흐르게 된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신앙인 들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성 묵상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감성마저도 점차 정화되면서 묵상보다 한 차원 높이 올라간 관상의 단계에 이른다. 관상이란 성령의 작용 아래 하느님과 보다 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관상은 크게 수득관상(修得觀想)과 주부관상(注賦觀想)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수득관상이란 닦아서 얻는 관상이란 뜻으로 수사가 개인적인 의지로 수도를 함으로써 얻는 관상의 경지를 말하고, 주부관상이란 물을 붓듯이 주는 관상이라는 뜻으로서 수사의 노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관상을 말한다. 전자가 능동적인 관상이라면 후자는 수동적인 관상이다. 카톨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보지 않고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깊고 본질적인 관상으로 본다.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영혼이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하느님을 외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와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피의 수행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크르(Zikr)라고 하는 명상법이다. 지크르란 '기억하다'는 뜻이다. 즉 항상 신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매순간 '알라 외에는 없다' 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입으로 하는 소리이지만 나중에는 마음의 소리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알라를 기억함으로써 수행자는 일상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내면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지크르는 수피춤이라고 하는 춤을 추면서 행하면 더욱 강렬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수피의 행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독특하게 보이는 것은 수피춤이다. 수피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은 한 손을 땅으로 향하고 한 손을 하늘로 향한 채 하늘과 땅을 축으로 하여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춤이다. 음악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데 이 때 수피들은 끊임없이 '알라 외에는 없다'를 외치는 것이다.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 지크르를 행하다 보면 어느 한 순간 황홀경의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의 수피들은 매순간 지크르를 행함으로써 산만하고 외부의 쾌감에 젖어 있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 깊은 곳에 있는 신을 자각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신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에 신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온다. 이것을 큐브르(Qubr)라고 한다. 이것은 오로지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속의 모든 욕망과 쾌락을 버린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지에만 이르러도 상당한 경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한다. 꾸준히 수행을 계속하면 큐르브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신을 찾는 행위와 신을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인 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마합바(Mahabba)라고 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객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세계의 여러 수행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합바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 상태를 화나(Fana)라고 부른다. 화나 상태는 신 속에서 에고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뜻이다. 이 화나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신이 항상 신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를 바카(Baqa)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수피들이 추구하였던 최고의 상태였다. 

묵상관상과 수피즘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경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의 현존을 인식하거나 또는 그 신 속에서 자신의 에고가 사라지는 경지이다. 이것은 결국 그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절하게 합일하기를 원하는 그 신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과연 이들은 서로 다른 신인가? 아니면 하나의 신인데, 이름만 서로 다른 것인가?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중의 하나는 가짜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각기 자기들이 믿고 체험하는 신만이 이 우주의 유일한 창조주라고 주장한다. 이들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믿는 신만이 유일한 창조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였듯이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나온 착각이다. 이제 우리는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나온 배타성은 극복해야 한다. 

후자의 입장은 하느님과 알라가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절대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기독교와 이슬람교 외의 다른 종교의 신에 대해서도 인정을 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입장을 종교다원주의라고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지독한 배타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것 또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의 신은 이름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도 너무 다르다. 알라나 야훼는 사후에 영원한 지옥이나 영원한 천국에 살게 하는데, 시바신은 사람을 윤회시킨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무명에 의해 윤회한다고 한다. 도데체 어느 것이 진짜인가? 사실 제각기 서로 다른 세계관을 고수한 채 외적인 공존만을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어정쩡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수행자와 종교인들은 여전히 집단주관적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깨달음이 절대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수행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절대 객관적인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교와 수행은 영원히 집단주관적 믿음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행법과 깨달음을 찾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