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
⑫이규보 ‘동국이상국집’ |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縱橫)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고려사』 「이규보열전」
『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이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는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의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긴 기다림 끝의 명예와 비방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아 일찍부터 문재를 드러냈지만 과거에 몇 차례 낙방하였고, 23세에 급제한 후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구직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하였다. 32세인 1199년 6월 비로소 전주목 사록(全州牧司錄)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나, 이듬해 12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1202년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부 녹사 겸 수제원(兵部錄事兼修製員)으로 종군하여 1204년 3월 개선하는 군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해마다 첫 번째로 추천을 받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관직을 얻지는 못하였다.
1207년 한림이 된 이후에야 중앙의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랫동안 국가의 문장을 담당하였다. 재상의 반열인 종1품까지 승진하여 1237년 70세로 치사(致仕)하였으니, 63세에 잠시 부안의 위도(猬島)로 귀양간 일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할 만하다.
이규보의 관직 진출과 승진에는 당대의 권력자인 최충헌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는데, 한림이 되기 전에는 최충헌이 모정(茅亭)을 짓자 이인로(李仁老) 등과 함께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었고, 이보다 앞서 1199년 첫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도 최충헌의 집에 불려가 시를 지었다. 최충헌과 관련된 이규보의 이러한 행적은 “최씨에게 아첨하여 사론(士論)의 죄를 얻었다.”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의 평가처럼 이규보 생전에도 권력자에게 아부하였다는 비방과 조소가 뒤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천마산의 백운거사 이규보는 18세 때 53세의 오세재(吳世才)와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어 이인로, 오세재, 임춘(林椿) 등이 칠현(七賢)이라 자칭하며 모인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동참하는 시와 술에 침잠하는 시간을 보냈다.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곧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규보는 부친상을 계기로 천마산에 은거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자호하였다. 「백운거사어록」에서 거문고와 술, 시 세 가지를 매우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고 싶지만, 좋아하기만 하고 잘 하지 못하므로 백운의 장점을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규보는 운(韻)을 부르자마자 나는 듯이 붓을 달려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술에 취하면 시는 더욱 거침없어져 ‘만취한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지은 장편율시에 한 글자도 고칠 것이 없다’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는 남다른 재능과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솜씨인데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陳翰林雙韻走筆)”로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남아 있다. 훗날 술 마시고 하는 시 짓기 내기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젊은 날에 지은 시 300수를 불태우며 지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술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은 도처에 드러나 있다.
無酒詩可停 술이 없으면 시도 내키지 않고 年已涉縱心 나이 벌써 일흔을 넘었으며 #주변에 미친 세밀한 눈길 이규보의 시 가운데에는 가족과 주변 사물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세밀한 관찰의 결과가 담뿍 담겨 있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무거운 짐을 지고 매를 맞는 소, 거미줄에 걸린 매미, 고양이, 쥐 같은 동물이나 밤이나 햅살 같은 식물 그리고 몽당붓이나 깨진 벼루에게도 고루 향하였는데, 아무래도 오랜 기간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미친 결과가 아닐까. 밤을 노래한 시에는 ‘밤은 사람에게 유익한 과일인데 밤을 노래한 시가 적어서 짓는다’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하였다. 葉生朱夏候 잎은 여름철에 돋고 人盜天生物 사람은 하늘이 만든 물건 훔치는데 #역사로 남은 시 천마산에 은거하던 20대의 이규보는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동명왕편」 등의 장편 시를 남겼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라고 구체적인 창작 동기를 언급하였다. 또한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주석으로 남겨 놓았으니,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나마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사의식 덕분이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면서 지은, 살 때보다 팔 때 더 받은 집값을 돌려준 노극청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극청천(盧克淸傳)」이나 나룻배를 타면서 겪은 일을 적은 「주뢰설(舟賂說)」은 청렴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당대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에서 지은 것이다. 산문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소재로 지은 시들도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因論花溪採茶時 화계에서 찻잎 따던 때를 이야기하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1241년 완성되어 8월에 간행에 착수하였으나, 이규보는 문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9월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함(李涵)이 시문을 추가하고 「연보」, 「묘지명」 등을 더하여 12월에 53권 14책으로 간행되었다. 1251년에는 손자 이익배(李益培)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중간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본은 “국내에는 잃어버린 것을 일본에서 구해와 지금 다시 간행하였다.”는 『성호사설』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 때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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