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행 이야기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자공 우주
2007. 6. 22. 09:41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옛날 어느 큰 부자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내노라 하는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다를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선비가 허름한 옷차림으로 잔치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선비의 행색을 훑어보던 문지기가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같은 거지는 들여보낼 수 없소.”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요? 썩 물러나시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한 선비가 한켠에 비켜서서 보니, 의복을 근사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허리를 굽신거리며 안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는 집으로 돌아와 의관을 깨끗하게 갖추어 입고 다시 문지기 앞에 섰습니다. 문지기는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깍듯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비는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에 놓인 상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선비는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순전히 의복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술잔을 들어 자기 옷에다 따루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아니, 술을 왜 옷에다 따르십니까?”
선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로지 이 옷 덕분이라서 옷에다 먼저 술한잔 따루었습니다. 자, 많이들 드십시오.”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자가 의지해야 할 네 가지 법(四衣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법을 의지하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고 하셨습니다. 이는 법을 중요시해야지 사람의 모양새를 보고 좋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지혜를 의지하되 분별의식을 의지하지 말라(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하셨습니다. 지(智)는 진리의 세계이자 도의 세계이고, 식(識)은 중생계입니다. 지혜를 성취하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알음알이, 곧 자기 자신의 인식을 기준으로 해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존재가 바로 중생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식의 놀음이고, 성인의 세계는 지혜의 놀음이니 지혜를 의지할 뿐 식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뜻을 의지하되 말을 의지하지 말라(의의불의어=依意不依語)’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때에 따라서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고놈 참 얄밉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 귀엽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에 뜻에 의지 해야지 말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요의법문을 의지하되 불요의 법문을 의지하지 말라
(의요의불의불요의=依了意不依不了意)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완전히 그 뜻을 요달하여 진리의 세계를 완벽하게 말한 것을 요의법문이라 하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한 과정만을 이야기한 것을 불요의법문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하는 계의 경우, 소승법(小乘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가 직접 살생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만, 대승법(大乘法)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가 고기를 먹음으로써 살생의 간접적인 동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법을 불요의법, 대승법을 요의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은 진리, 지혜, 뜻, 그리고 요의법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법문의 내용보다 겉모습에 빠져서 법문을 듣는다면, 깨달음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을 중요시하는 삶! 이를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때 선비가 허름한 옷차림으로 잔치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선비의 행색을 훑어보던 문지기가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같은 거지는 들여보낼 수 없소.”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요? 썩 물러나시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한 선비가 한켠에 비켜서서 보니, 의복을 근사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허리를 굽신거리며 안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는 집으로 돌아와 의관을 깨끗하게 갖추어 입고 다시 문지기 앞에 섰습니다. 문지기는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깍듯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비는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에 놓인 상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선비는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순전히 의복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술잔을 들어 자기 옷에다 따루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아니, 술을 왜 옷에다 따르십니까?”
선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로지 이 옷 덕분이라서 옷에다 먼저 술한잔 따루었습니다. 자, 많이들 드십시오.”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자가 의지해야 할 네 가지 법(四衣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법을 의지하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고 하셨습니다. 이는 법을 중요시해야지 사람의 모양새를 보고 좋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지혜를 의지하되 분별의식을 의지하지 말라(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하셨습니다. 지(智)는 진리의 세계이자 도의 세계이고, 식(識)은 중생계입니다. 지혜를 성취하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알음알이, 곧 자기 자신의 인식을 기준으로 해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존재가 바로 중생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식의 놀음이고, 성인의 세계는 지혜의 놀음이니 지혜를 의지할 뿐 식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뜻을 의지하되 말을 의지하지 말라(의의불의어=依意不依語)’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때에 따라서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고놈 참 얄밉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 귀엽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에 뜻에 의지 해야지 말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요의법문을 의지하되 불요의 법문을 의지하지 말라
(의요의불의불요의=依了意不依不了意)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완전히 그 뜻을 요달하여 진리의 세계를 완벽하게 말한 것을 요의법문이라 하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한 과정만을 이야기한 것을 불요의법문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하는 계의 경우, 소승법(小乘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가 직접 살생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만, 대승법(大乘法)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가 고기를 먹음으로써 살생의 간접적인 동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법을 불요의법, 대승법을 요의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은 진리, 지혜, 뜻, 그리고 요의법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법문의 내용보다 겉모습에 빠져서 법문을 듣는다면, 깨달음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을 중요시하는 삶! 이를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소개할 말씀은 근세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경허(鏡虛)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수행의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