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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우리는 단학, 요가, 화두선, 비파사나, 묵상관상, 수피즘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비교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모든 수행법들은 제각기 그 수행법을 탄생시킨 그 지역의 세계관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단학에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이고 요가에는 인도 사람들의 세계관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각 지역의 세계관이나 문화에는 세계 공통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그 지역만의 특유한 부분들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의 과정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도의 프라나나 동북아의 氣는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그 가리키는 내용은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요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쿤달리니는 단학에는 존재하지 않고 단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소주천이니 대주천이니 하는 것들은 요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행의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깨달음 또한 그 지역의 세계관적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요가, 단학, 비파사나, 화두선,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관상의 깨달음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많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하기 힘든 초월적 감각의 열림, 지고한 정서적 고양, 심오한 우주적 통찰력의 열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의 여러 깨달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문화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깨달음이 완전한 절대 객관의 진리인가?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깨달음만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양상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어떠한 언어와 형상을 넘어서는 절대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깨달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제각기 자신의 문화권의 틀에 따라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서로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론 이전의 자기중심적 태도에 비해서는 훨씬 성숙된 견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 또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은 수행을 통하여 절대객관의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행을 통하여 일상의 오감이나 사유작용을 완전히 넘어선 절대 근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수행법의 체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오감이나 사유 작용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한다. 그들은 에고의 좁은 틀을 벗어나 우주의 무한성을 체험하거나 에고의 느낌이 사라지는 무아지경을 체험하거나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벗어나는 상태 등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들은 굉장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지고하고도 초월적인 체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주체가 있는 한, 즉 살아있는 한, 그 속에는 주관성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필자 자신의 실제적 체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나온 결론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 혹은 무한성의 바다에 개체의식이 완전히 녹아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하더라도 주관성이 100 퍼센트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궁극적인 본체를 체험하는 순간에도 주관적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한다. 이것은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아무리 완벽한 실험기구와 측정방법을 갖추어도 관찰자의 입장을 100 퍼센트 배제한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요기들의 사마디, 선사들의 깨달음, 남방선사들의 닙빠나, 수피나 카톨릭 수사들의 신성의 체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굉장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깨달음에도 그가 속한 문화권의 집단주관적 틀과 개인 주관의 틀의 흔적이 약간씩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음이라 불러왔던 그 체험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주관적 착각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원래 모든 유한한 개체는 본질적으로 무한한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무한한 전체성을 종교에 따라 佛性이라고도 하고 神性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하나의 개체인 동시에 거대한 전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체성을 알지 못하고 유한한 개체성이 자신의 전부이자 원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수행의 세계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초상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나아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한한 전체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지에서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점에 가까운 것은 틀림없지만 결코 종점은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인식의 주체가 소멸할 때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인식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육체는 죽어도 인식의 주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요즈음 사후세계의 비밀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으며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을 하는 분도 있다. 나의 견해로는 육체는 죽어도 우리의 인식 주체는 소멸되지 않고 영계의 다른 곳에 일정 기간 머물다가 다시 육체를 입고 이 물질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윤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밑도 끝도 없는 윤회와는 다르다. 그것은 나선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후세계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차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윤회를 통하여 인식이 점차 확장되면서 개체성보다는 전체성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전체성에 가까워질수록 무한성이나 무아의 체험들,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체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완전한 전체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개체성 속에는 원래 전체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한 전체성을 얻는 순간 오랜 세월 윤회를 거듭해온 인식주체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인식의 주체가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어떠한 앎도 불가능하고 아울러 어떠한 전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깨달음이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굉장한 체험을 하였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향하여 다시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금 이 순간 완전한 깨달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길을 가던 그 자는 바로 지금 현재의 이 순간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최선을 다하여 나아갈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과 수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부적인 규칙이나 법칙들을 전혀 새로운 각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패더다임으로 기존의 수행법들을 비판해볼 필요성이 있다. 많은 수행법들이 제각기 자기들이 최고라고 주장하지만 그 가운데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효과에 집착하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수행법이라 하더라도 그것 또한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하면 보다 효율적이고도 안전하게 완전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회에서 논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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