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지리산의 주요 21개 봉우리(미산루에서 펌)
지리산의 주요봉우리 21개봉
천왕봉. 반야봉 . 제석봉 . 형제봉 . 연하봉 . 삼신봉 . 웅석봉 . 노고단 . 중봉 . 하봉 . 촛대봉
토끼봉 . 삼도봉 . 정령치 . 만복대 . 세걸산 . 덕두산 . 고리봉 . 삼정산 . 벽소령 . 여원치
"천왕봉"
智異의 천왕봉은 언제 찾아도 웅장한 모습을 달리 하고 있다.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 칠 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천왕봉은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지리의 주봉은 계절마다 준비해 둔 멋진 옷을 갈아입는 듯 정월의 풍광은 쪽빛 하늘에 수 놓은 듯 피어난 영화가 마치 산호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 다움을
연출 하며 경건함을 보여주고 있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 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 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 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 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 치듯 흐르는 물보라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루는 천왕봉은 함양 방면으로 칠선 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 내며 산청 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 계곡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세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한데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인의 젖줄이 된다. 운무에 휩싸인채 말없이 억겁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천왕봉은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터전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천왕봉정상에는 현재 82년 여름 경상남도가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 전면에는"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이 표기돼 있다.
그전에는 진주 산악인들이 남명 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를 새겨 표지석 으로 세워 두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 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 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겨져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성스러운 모습을 하며 인간을 자연으로 부르는 천왕봉은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 들로 이뤄져 있으면서도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을 빚어내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가다 보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이 샘물은 천왕샘으로 불리고 있는데 명산을 찾는 등반객들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대대적인 자연보전 활동에 힘입어 천왕봉 주변의 쓰레기가 다소 줄어들긴 했으나 천왕샘 주변엔 가끔씩 수북히 쌓인 쓰레기가 눈에 띄고 있는 데다
국립공원관리 공단이 세운 천왕 샘 안내간판 뒷면에는 어지럽게 적힌 낙서들로 뒤덮여 있어 안타깝게 하고 있다.
5백년전 우리네 선인들이 대 자연을 음미하여 풍류를 노래하고 호연지기를 키웠던 지리산 산행기를 한번 탐독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천왕봉 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기라도 하듯 뭇 인간들을 보내지를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은 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 이에 게는 천지 개벽을 연상케하는 일출광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 오게하고 있다.
이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깍아 지른듯한 날카로운 비탈길과 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두 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 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개천문은 법계사를 거쳐 정상으로 향하다 보면 나타나는데 원래 좌우로 두 개의 바위기둥이 서 있어 위용을 자랑 했는데 한족은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
하늘을 여는문이 라해 개천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늦은 가을이나 초겨울에 중산리∼법계사∼천왕봉 코스를 따라 오르다 보면 가끔씩
개천문을 기점으로 해 정상쪽에는 눈이 내리는데 비해 아래로는 비가 내리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으며 간혹 설화가 이 문을 경계로 해 활짝 핀 광경을 목격 할
수도 있어 천왕봉의 관문임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도 있다.
개천문은 그러나 통천문에 비해 위엄은 부족하다. 통천문은 노고단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마지막 관문으로 "하늘을 오르는 문"다운 위엄을 갖고 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풍경화 같은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 보면 눈앞을 가로막은 문이 바로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자체가 천연 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등반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통천문의 위용은 시인 고은의 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 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왕봉은 이 처럼 두 관문을 두고 있을 정도로 위엄을 갖추고 있으나 이들 두 관문의 역할이 있기에 천왕봉은 더욱 신비함을 간직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육의 "유 지리산록"에서
천왕봉에서 동으로 내려가면 천불암,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어 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으며 이름은 암 법주굴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내려와 살천에 이르러 합쳐서 하나가 되 어......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과는 달리 현재는 법계사의 3층 석탑만이 모든 것을 아는 듯 묵묵히 남아 있다.
선인들의 지리 산행기를 따라 옛것을 되새겨 발굴해 봄직도 하다. 천왕의 모습은 천의 얼굴을 하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기 에 아직 그 누구도 지리를 다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멀리 천왕은 1백여리 능선길 마다에 변화 무쌍함과 아름다움을 숨겨놓은 채 한민족의 역사를 지켜봐 온 듯 넉넉함으로 남아 있다.
"남한 제일의 천왕봉 1,915m"
"반야봉"
반야봉(般若峰)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의 제2봉이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이다.
주봉(1,732m)과 중봉이 절묘하게 빚어낸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답게 노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많이 한다. 그 누가 보아도 두 봉우리의 정다운 모습을 보면 금방 지리산 사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반야봉은 또한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내는 지리산 8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화려한 불꽃잔치와 더불어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태산준령들 사이 사이에 걸려있는 지리산의 운해는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과 반야봉에 얽힌 마고할미와 반야의 애틋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려는 듯
심오함을 갖고 있다.
반야봉에는 지리산 산신 중 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그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선지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데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반야봉의 애틋한 전설과 장엄한 낙조의 경관을 찾아 나서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대개 종주등반길에 잠시 들르는 방식을 택한다.
종주산행을 하면서 반야봉은 어쩌면 선택사양 품목과도 같다.
종주등반 과정에서 반야봉을 생략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곳에 오를 경우 1시간이라는 시간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산의 진면목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야봉은 반드시 올라야 한다.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는 지리산의 참된 모습을 보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야봉을 오르는 길은 종주등반 중에 잠시 둘러보듯 찾는 것보다는 반야봉 자체를 대상으로 달궁에서 올라야 반야봉의 묘미를 알 수 있다.
달궁은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2000년전 백제와 가야, 신라에 쫓긴 마한(馬韓)의 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궁전을 지었던 곳이 달궁이다. 이른바 "달의 궁전"이란 달궁에서 반야봉을 오른다는 것은 매우 값진 체험이 될 수 있다.
달궁∼반야봉은 8km 거리이다. 달궁마을에서 달궁계곡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계곡을 가로 지르는 쇠다리를 만난다.
달궁에서 이곳까지는 계곡과 나란히 성삼재로 향하는 포장도로가 있어 도로를 따라갈 수도 있지만 이는 생각않는 것이 좋다.
달궁계곡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별유천지 달궁계곡의 진수를 느끼며 걷다보면 쇠다리 부근, 쟁기소를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500여m 가량 가면 지계곡이 흐르는데 이곳에서부터 반야봉까지 식수를 구할 곳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물을 확보해야 한다.
줄지어 선 암봉들을 오르내리면 주변의 빼어난 절경을 음미해 볼 수 있다. 노송과 암릉의 절묘한 조화를 탄복하며 매혹적인 능선길을 한참 오르다보면
큰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급경사의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삼거리에 닿는다.
반야봉에서 이곳까지 1km 심원계곡으로 가는 길과 달궁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삼거리 지점에서부터는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로 이어지는데 곧 중봉이 나타난다. 헬기장도 있고 무덤이 군데군데 있는데 천왕봉 아래의 중봉과 이미지가 흡사하다. 여기서 주봉인 반야봉 정상까지 가려면 비탈을 한차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바로 이곳 중봉이 멀리서 볼때 여인의 둔부모양 중 조금 낮은 곳이며 높은 곳이 반야봉 정상이다.
탁 트인 사방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반야봉에 오르면 신선이 된 느낌을 받는다. 5월이면 두 봉우리는 화려한 철쭉의 향연이 베풀어진다.
그리고 이름모를 산야초가 운무와 뒤섞여 있을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곳이 반야봉이다.
달궁에서 반야봉을 오르다보면 자연휴식년제로 인한 입산통제간판을 만난다.
쟁기소 부근과 중봉 아래 삼거리, 그리고 반야봉 정상에서 중봉쪽에 각각 세워져 있다.
"제석봉"
장터목~천왕봉 3km 구간은 제석봉의 고사목지대와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 등의 경관이 특출하고 낭만적인 길이 이어져 있다.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연봉 천왕봉은 동 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한층 유명 하다. 이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제단 주변은 평편한 공지여서 현재는 등산객들의 야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 있고 바닥은 풀밭일 뿐이다.
고사목 그 자체는 재난으로생명을 중도에 마감한 나무들의 시체여서 살벌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고사목 들이 한 두 그루도 아니요, 10만여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경관이 되고 있다.
'이곳 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다. 고사목의 훼손금지는 물론 이곳 에서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지한다.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지한다.
그러나 이곳의 고사목들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누구의 소행 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방화로 한번 죽었던 나무들이 또 다시 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40 년째
침묵의 증언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고사목들도 '살아있는 자연경관' 으로 잘 보전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제석봉에서 고사목 사이로 서쪽을 바라보면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히 떠올라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형제봉"
하동군 악양면의 형제봉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 섬진강에 잠기기 전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멀리 천왕봉에서 제석봉 촛대봉을 거쳐 비경의 남부능선을 따라 이어져 온 지리의 산세는 비옥한 대지를 빚어내는 형제봉∼신선봉을 끝으로 섬진강에 잠긴다.
지 리산의 산세는 섬진강 밑을 지나 다시 광양의 백운산으로 이어진다.
형제봉은 세석에서 시작되는 남부능선의 종착 봉우리로 불리지만 대개 남부능선 등반에서는 제외되고 있다.
이는 세석∼삼신봉∼성불재 구간에서 대부분 불일폭포, 쌍계사코스로 직행하고 비교적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는 성불재∼형제봉 코스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남부능선은 분명 세석∼삼신봉∼성불재∼형제봉∼ 신선봉∼고소산성에 이르는 30 km의 장쾌한 능선이지만
대개 세석∼삼신봉∼ 쌍계사간 20km 구간만을 산행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쌍계사, 불일폭포 등의 빼어난 경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불재∼형제봉∼신선봉∼고소산성구간의 빼어난 산세 역시 불일폭포나 쌍계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해발 1,115m의 형제봉은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깊은 형제와 흡사하다해 붙여진 지명이다.
남부능선의 끝자락이면서도 정작 남부능선 종주산행에서 제외되곤 하는 형제봉이지만 형제봉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산행 대상지여서 최근 주말 산꾼들 에게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 "土地"의 주무대인 악양면 평사리 들녘의 풍성함과 아름답고 푸르게 흐르는 섬진강의 비경 그리고 섬진강 건너 지리의 지맥이 그대로 이어져 우뚝 솟은
백운산의 자태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형제봉이기 때문이다.
형제봉의 등산로는 대부분 악양면 등촌리에서 시작되는데 하산은 신선봉, 고소성을 따라 19번 국도로 향하는 코스와 성불재를 거쳐 쌍계사로 향하는 코스가 있다.
주말 산꾼들은 주로 악양면 등촌리를 시발점으로해 형제봉에 올랐다가 고소산성을 따라 하산하기도하며 쌍계사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지리산 산행이라기보다 독립된 형제봉으로서의 산행을 만끽할 수 있다.
형제봉을 산행하면서 음미해 볼 수 있는 것은 해발 300m에 위치해 있는 고소산성과 토지의 평사리, 그리고 중국의 악 양성과 지세가 유사하다는 악양의 절경등을
들 수 있다.
"연하봉"
지리산 주릉을 종주하다 보면 가끔씩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노고단방면에서 출발하든 대원사방면에서 등반을 시작하든 주릉 가운데 명선봉 아래에 위치한 연하봉에 이르면 고산지대 특유의 색다른 감흥에 젖게 된다.
늘 옥류가 흐르며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감도는 연하천의 운치는 가히 천상의 분위기 그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천왕봉의 일출광경과 신비한 반야봉의 낙조를 영겁의 세월동안 간직한 채 대자연의 섭리를 알듯말듯 인간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연하봉은
늘 그렇게 변함없이 지리산에 있다.
연하천은 한자로 烟霞泉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매우 서정적 느낌이 든다.
굳이 풀이 해본다면 오묘한 대자연(烟霞)속의 정취어린 샘(泉)이 있는 곳이라 말할만한다.
연하천의 위치는 토끼봉과 명선봉 삼각고지, 벽소령 사이의 능선상 가운데 명선봉 아래에 있다.
토끼봉에서 6km거리며 벽소령에서도 6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인데도 맑고 시원한 계류가 흐르며 남·북·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여 있는 숲속의 연하천은 널따란 평지를 이루고 있다.
82년 이전까지만해도 야영객들의 텐트가 항상 무리지어 보였으나 산장이 건립된 후로는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산장을 이용하고 있다.
50제곱미터 남짓한 아담한 연하천산장은 50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초미니 산장이다.
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직영하는 대규모 산장에 비해 결코 그 정감은 뒤지지 않는다.
추운 겨울 날이든 장대비가 쏟아 지는 여름 날이든 피로에 지친 산꾼에겐 정감어린 쉼터가 돼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연하천산장은 항상 등산객들로 붐벼 새우잠으로 하룻밤을 묵어야 할 정도다.
8km 거리에 뱀사골 산장이 있으나 종주산행에 지친 등산객들이 연하천 산장을 많이 이용하는 탓이다.
그러나 6km 떨어진 벽소령에 초대형 산장이 들어 서면 연하천 산장은 한산해 질 수 밖에 없다. 산장과 등산로 곁에는 사연모를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오가는 산꾼들이 망인의 넋을 기려 십자가를 세워놓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연하봉 가는 길은 주릉 이외에 별도로 열려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뱀사골 지계곡인 와운골에서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
이 등산로는 일반 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 뱀사골을 거쳐 화개재, 토끼봉, 명선봉을 따라 찾는 경우가 많다.
또 하동군 의신마을에서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빗점 골을 거쳐 오르는 등산로도 열려 있다.
이 등산로는 희미하고 험하여 찾는 이가 드물다. 연하천 가는 길은 이외에도 삼각봉을 거쳐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이 길이 가장 짧은 거리로 연하천산장에서 물품을 운반할 때 주로 이용하고 있다.
와운골에서 오르는 길은 뱀사골 입구 즉 반선에서 와운교를 건너 와운마을을 지나 뱀사골의 지계곡인 와운골을 따라 감도는 능선상으로 열려 있다.
반선에서 와운마을까지 2km 남짓하며 와운마을에서 연하천까지는 9km, 합하면 11km 거리다.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등산로는 비교적 잘 열려 있으며 어렵지 않게 등반 할 수 있다.
오르기전에 와운마을에서 주민들의 조언을 듣는것도 산행에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 발굴된 등산로인 만큼 오르다보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삼각 고지를 거쳐 함양군 삼정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8km 거리로 가장 빠른 길이다.
함양군 삼정은 양정, 음정, 하정 등 세마을을 합쳐 부르는 것으로 하동군 삼정마을 과 혼돈되기도 한다.
함양군 삼정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벽소령 작전도로 입구에서 시작된다. 삼정에서 4km 가량 가다보면 작전도로를 벗어난 등산로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다시 2km가량 오르면 삼각고지에서 흐르는 능선길과 만난다.
이 능선을 따라 2km 오르면 삼각고지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종주능선과 만나 곧장 연하천에 닿는다.
등정시간은 3시간이면 충분하고 하산은 2시간 가량 잡으면 된다.
연하천 주변은 빼어난 산세로 어우러져 있는데 그 경관 못지않게 아픈 전쟁의 상흔이 전해지고 있다. 명선봉과 삼각고지, 형제봉, 벽소령 구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실물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
형제봉 아래는 커다란 바위산에 뚫려 있는 연하굴이 있다.
길이가 15m 가량, 20여m 깎아 지른 절벽아래에 커다란 굴이 있는 것이다. 20여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어 산행중 긴급 대피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삼각고지는 연하봉에서 1km 남짓한 거리에 있는데 하동군 화개면과 함양군 마천면, 그리고 남원시 산내면의 경계지점으로 유명하다.
삼각고지는 3개면의 경계지점이지만 반야봉 아래 삼도봉(일명 낫날봉)은 경남, 전남, 전북 3도의 경계지역이다. 간혹 삼각고지를 3도 경계지점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 일대 울창한 수림은 빨치산의 활동무대로 적합해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당시 무장공비들의 은신처 였다 한다.
삼각고지에는 아직도 군사용 벙커 흔적이 남아 있는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해 삼각고지 - 명선봉 - 벽소령 일원을 피의 능선이라 부르는 이도 있을 정도다.
연하봉 일원의 절경과 신비한 산행의 묘미를 마음껏 맛보면서 한편으로는 오래지 않은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되뇌며 찾아 나서 봄직 하다.
"삼신봉"
삼신봉(三神峯)은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로서 참다운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 바다의 일망무제,
탁트인 전경을 선 사해준다. 특히 인적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으로는 묵계 치를, 서쪽으로 생불재(상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북쪽으로는 수곡재와 세석 을 이어주는 사통팔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삼신봉 특히 외삼신봉을 기점 으로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 있는데
우선 남부능선코스가 대표적이며 청학동에서 삼신봉, 상불재를 거쳐 다시 청학동으로 향하는 순환코스, 삼신봉∼상불재∼불일 폭포, 삼신봉∼거림골 등이 그것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三神山 중의 하나로 불려왔다.
그 삼신산 중의 하나인 지리산 에 삼신봉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더욱이 그 지리산에 신을 상징하는 "神" 자가 붙여진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그것도 남북으로 삼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내삼신봉, 외삼신봉, 그리고 세석고원 서쪽의 영신봉이 그것이다. 이들 세 개의 봉우리 주변을 중심으로 해 고래로부터 전해져오는 이상향,
즉 청학동의 유래를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는 현재 진정한 청학동임을 자처하며 촌락 을 형성하고 있는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이 바로 삼신봉 3km 아래 위치해 있는 사 실과 천년여전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입산자 취가 유난히 이 일대, 쌍계사와 화개동천 등지에서 많이 보이는 사실도 이러한 느낌을 갖게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상향을 찾 아 헤매면서 유독 이 일대를 중심으로 입산, 은거했다는 점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학동이 어디쯤인지"에 관한 오랜 탐구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지명이 가장 많 은 화개동천 주변과 "청학동"의 의미와 실체는 차후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삼신봉∼불일폭포, 삼시봉 일원의 등산로 등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 한 "남부능선"에 이어 남부능선의 나머지 구간을 중심으로 찾아보기로 한다. 청학동 마을에서 삼신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는 내삼신봉, 오른쪽이 외삼신봉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중 내삼신봉이 해발 13 54m로 가장 높지만 통칭 삼신봉은 이보다 해발이 낮은 1284m 의 외삼신봉을 대표 해서 부른다.
세석에서 10km 남쪽으로 뻗어내린 삼신봉을 기점으로 해 남부능선코스는 내삼신 봉∼상불재를 거쳐 멀리 형제봉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남부능선 전체의
구간으로 세석에서 근 1백여리에 가까운 장대한 능선으로 주릉에 버금간다. 이 구간의 등 반은 일반 등산객들에겐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능선으로
이용하는 등산객이 드물다.
대신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불일폭포까지 20km 구간을 많이 찾는다. 세석에서 하산할 경우 삼신봉까지 3시간30분가량,
다시 삼신봉에서 불일폭포까지 3시간 등 모두 6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반대로 오를 경우는 7시간 이상 걸린다.
하산하는 경우 무리없이 산행할 수 있는데 그보다 세석∼삼신봉∼청학동 또는 청학동∼삼 신봉∼불일폭포로 구간을 나누어 등반하면 당일 등반도 가능한 이점이 있다.
주 로 많이 찾는 삼신봉∼불일폭포 구간과 삼신봉∼상불재∼청학동 순환코스는 장대 한 주릉의 경관과 화개동천의 선경못지 않게 능선에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 기 암절벽에 매료된다.
운치있는 산행의 표본이 될 정도로 이들 구간은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삼신봉 아래에는 쌍계사, 청학동, 세석산장을 가르키는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는데
여기 서 쌍계사 방면으로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따라가면 송정굴, 내삼신봉, 쇠통바위 를 거쳐 상불재에 이르기까지 5km 남짓한 거리에 기암절벽들이
환상적으로 어우 러져있다. 대략 1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처음 나타나는 송정굴을 길이 20여m, 폭 10여m, 높이 1.5∼2m의 다소 널찍한 관 통굴이다.
송정 하수일선생의 피난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거대한 암봉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내삼신봉이다.
신선대라 불리기도 하며 마치 금강산 한 부분을 옮겨 놓은 듯해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신선대의 절경을 지나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치 바위위에 자물쇠가 얹혀 있 는 모습을 한 거대한 바위를 만난다.
쇠통바위라 부른다. 이 쇠통바위는 청학동 사람들에겐 큰 의미를 가진 바위다. 청학동 사람들은 학동마을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이 쇠통바위를 열어야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천국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웅석봉"
지리산 등산로는 천왕봉을 정점으로해 멀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양하게 열려 있다.
산이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길은 동시 에 다양하게 많은 갈래를 이루며 생겨나게 마련이다.
지리산의 등산로 역시 근년에 들어 등산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천왕봉∼노고단 사이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등산 패턴에서 벗어나 차츰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흔히들 지리산 등반을 얘기하면서 천왕봉을 몇 번 올랐는지에 대한것 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지리산의 진면목을 얼마나 다양하게
답사 했는지의 여부가 더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복잡한 산업 사회에서의 일상을 벗어나 좀 더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을 찾고 싶 은 건 현대인의 공통된 심리일 것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지리산 등산로는 이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며 갈수록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등산로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그러면서 지리산의 등산 영역은 갈수록 넓어지 고 등산로는 자꾸만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실제로 7∼8년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 등산코스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정해져 있었 을 정도였다. 그러나 성삼재 도로 등이 개설되고 등산인구가 증가하면서
주릉을 벗어나 서북릉의 만복대∼세걸산∼바래봉∼인월 등에 이르기까지 등산로로 각광 받게 됐다.
또한 동부권역인 산청·함양군 지역의 경우도 밤머리재 도로가 개설 되면서 종래의 지리산 등산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것이 하봉∼웅석봉 사이의 다양한 등산로가 각광을 받고 있 다는 사실이다.
천왕봉의 그늘에 가렸던 하봉이 이제야 제몫을 톡톡히 하면서 앞 으로 천왕봉∼하봉∼웅석봉을 연결하는 등산로가 크게 각광받게 될 전망이다.
지리산 동부권역의 종점에 해당하는 봉우리가 웅석봉이다. 여태껏 지리산과는 남 남처럼 일반에 인식돼 왔으나 실제는 지리산의 한 부분이며 특히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만큼 많은 등산인구가 찾아들고 있다.
특히 웅석봉은 그동안 특별한 관심을 두고 찾은 등산객들도 대부분 험준한 산세에 눌 려 다시는 찾고 싶지않은 산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밤머리재 도로가 개설되면서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 도로를 따라 차편으로 올라와 웅석봉 정상까지 능선길을 타는 기쁨은 한 폭의 거대한 동양화 속을 거니는 그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웅석봉에서 바라 보는 지리산이야말로「지리산이 한국인의 산으로 추앙받는 추상적 이미지를 구체 화 시켜주는 것」이라고까지 묘사할 정도의
으뜸 전망대이다.
하봉에서 쑥밭재 왕등재 밤머리재를 거쳐 웅석봉에 이르는 동부능선 자체의 장관 과 함께 웅석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지리산의 장대무비함은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하물며 천왕봉을 올랐을 때보다 웅 석봉에 올라 천왕봉을 바라보는 것이 더 감동적이며 웅석봉을 오르지 않고는 지 리산이 어떠했는지를 말할 수 없다고
이곳을 찾는 이들은 주저없이 말하고 있을 정도의 명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천왕봉을 기점으로해 지리산은 동남쪽으로 중봉∼써리봉∼구곡산에 이르는 동남 부능선(황금능선),
중봉∼하봉∼두류봉∼추성산성을 잇는 하봉능선, 중봉∼하봉 ∼왕등재∼웅석봉을 연결하는 동부능선등 3개의 능선이 뻗어 있는데
이 중에서 천왕봉의 위용과 고고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웅석봉에 이 르는 동부능선이다.
해발 1099m. 곰바위 봉우리란 뜻의 웅석봉(熊石峰)이 험준한 산세를 지녀 곰까지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죽었다는 유래를 가질 정도이면서 천왕봉의
그 아름다움 과 장대함을 수놓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천왕봉 바로 동쪽 코 앞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웅석봉은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왕등재를 거쳐 반원 을 그린 듯한 능선을 따라 내려와 천왕봉 바로 동쪽 끝에 솟아 천왕봉의 위대함 을 한 단계 승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밤머리재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웅석봉을 오르는 것은 순전히 밤머리재 도로 탓 이다.
이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웅석봉 등반하는 일이 천왕봉 오르기보다 더 힘들었다. 대개 해발 1099m란 사실만 믿고 지곡사방면이나 청계, 또는 어천계곡 방면에서
등반을 시도했다가 혼쭐나 웅석봉은 지루하고 다시 찾아볼 만한 산이 못된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던 곳이다.
그러나 밤머리재 도로와 청계방면의 도로 가 산허리까지 개설되면서 웅석봉의 등산로를 흔들어 놓고 있다.
산 중턱에서 능선을 따라 걷는 웅석봉 산행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이지 않고 운치를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노고단"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은 우리민족의 영원한 믿음의 성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이란 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신앙의 영지로 남아있는 이들 두 봉우리는
높이면에서는 해발 1,507m로 천왕봉의 그것과 비교해 다소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역사 이래로 우리 민중에게 부여해온 의미는 천왕봉에 비해 결코 뒤짐이 없다.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다.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화엄사 앞으 로 옮겨져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 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부악 (부악·지금의 팔공산) 이었다고 적혀 있어 지리산에서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리던 곳은 노고단이며, 남악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의미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을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과는 그 의미가 다 른것으로 풀이하고 노고단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을 진행한 것은
한 편으로는 민중들의 별도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게재했을 것으 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 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의 큰 흐름)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것으로 보아 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제례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 나 한말 융희2년 (1908)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년 12월 전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라시대 이래로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온 노고단은 또한 화랑의 심신수 련장으로 널리 활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세석고원까지 오가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의 드높은 기상이 아직도 노고단 언저리에 남아 있는듯 하다.
우리 민족의 안식처이며, 기개를 단련하던 노고단은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의 성지이며, 낙원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 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노고단 외국인 별장은 그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반란군들의 근거 지로 이용됐다가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점령됐으나 이후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워져 지금은 옛 건물의 흔적과 잔해만 남아 아팠던 근대 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건물이 불태워지면서 당시 노고단 일원의 울창 한 수목들도 때아닌 화마에 휩싸여 지금도 노고단 일대는 큰 수목은 좀체 보이지 않고 싸리등 관목류만 남아있다. 노고단은 잘 알려진 비경의 운해 이외에도 숱한 명승지를 같이하고 있으며, 탁트 인 시계로 멀리 무등산을 확연히 볼 수 있는가 하면 다도해의 장관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다.
예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관을 만복대 집선 대 문수대 청련대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다고 전해져 오는데 주위에 크고 작은 바 위군들이 찾는 이를 감탄케 한다.
지금은 노고단 턱밑까지 도로가 뚫려 연간 찾는이가 수십만을 헤아리고 있으나 모두들 이들 명승지를 미쳐 보기도 전에 다도해에서 실려온 운무가 산허리를 감 싸고 흐르면서 운해만리 구름바다 를 이루다 다시 점점이 흩어지는 비경에 홀리 고 만다.
겨울철에는 백설이 천하를 감싸안은 풍광을 연출해내 또다른 노고단의 모습을 선 사한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서기에 앞서 고개를 들어 노고단을 향하면 상록수 위 로 은가루를 뿌린듯 덮여 있는 노고정상의 설경은 노고단의 진면목을 새삼 실감 케 해준다. 햐얀 겨울속의 노고단 진풍경은 이듬해 봄 늦게까지 계속된다. 고원 지대의 겨울은 좀체로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새 봄 진달래가 움틀 무렵 끝났다 싶으며
아쉬운듯 다시 눈과 함께 ....
"중봉"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중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과 마주하며 서있는 중봉(中峯·1875m)이다.
중봉은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원시림을 자랑하며 智異의 제일에 해당하는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천왕봉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2km, 북쪽으로 뻗어내려 다시 하봉(下峯)으로 이어지는 능선 과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형성한다.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시 국 수봉으로 연결돼 구곡산까지 계속된다. 이 능선은 이른바 "황금능선"으로 불릴정 도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산세가 험난한데다 원시림과 울창한 산죽들로 인해 등산로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 일반 등산객들은 잘 찾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이 능선을 분기점으로해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있는데 바로 중봉골이다. 흔히들 이 중봉골을 일러 "지리산 최후의 비경"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 중봉골이 일반에 덜 개방돼 비교적 자 연 그대로의 계곡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실제 이 계곡에는 아직도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있으며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이 계곡 입구에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을
내걸어 일 부러 찾으려 해도 잘 찾아내기가 힘들도록 해 놓고 있다.
중봉골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는 순두류에서 법계사를 향해 1km를 가다보면 "순두 류 1km, 법계사 3km" 란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등산로 아 님"이라며 통행을 금지하는 철조망이 쳐져있다.
그러나 중봉골로 가려면 철조망 을 넘어야 한다. 또 다른 길은 안내판 조금 못가서 철다리를 건너자 마자 등산로 오른편으로 바로 들어가면 넓적한 바위와 함께
계곡이 나오는데 바로 이곳이 중봉골이다.
다시 말 해 천왕골과 중봉골의 합류지점이 바로 철다리 바로 아래 50m 지점이며 이 곳이 신선너덜인데 이곳부터가 중봉골인 셈이다.
신선너들 아래의 계곡은 굳이 부르자면 순두류 계곡이며 순두류 계곡은 여기서부터 중산리 매표소까지에 해당하고 그 아래는 중산리 계곡으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 중봉골은 깊이 숨겨져 있는 계곡은 아니다.
그러나 비경으로 숨겨져 인적이 드물 수밖에 없는 것은 대다수 등반객들이 지리산 등산을 계획할 경우 목 적지를 천왕봉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등산로를 따라 가다
보면 사실 중봉골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다 아직 등반객의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데다 골을 들어갈수록 험난하기 때문에 입산을 금지하고 있는 탓에 중봉골은 아 직 비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봉골을 등반하려면 순두류 1km지점까지 가서 오른쪽 철조망을 넘어 능선길을 따라 30여분 가량 지나다 보면 계곡이 나타나는데 이 지점(용추폭포가 있다)부터
계곡을 따라 중봉 또는 써리봉으로 오를 수 있다.
또 중봉과 천왕봉까지 오르려면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으므로 간단한 산책정도 로 등반을 하려면 용추폭포를 지나 마야 독녀탕, 윗용소 정도까지만 올라
곧바로 계곡으로 하산하면 스릴 넘치는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봉"
모든 산에는 상봉이 있게 마련이다 그 상봉을 중심으로 해 산은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어 하나의 산군을 이룬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을 위시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봉준령을 안고 있 는데 상봉인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하봉이 나란히 줄을 이어 연결돼 있다.
지리 산의 하봉은 낮다는 의미의 봉우리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결코 지리산에서 가 장 낮은 봉우리가 아니다. 해발 1781m의 준봉인데도 하봉으로 불리는
까닭은 상봉 인 천왕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탓이라 여겨진다.
늘 천왕봉과 바로 아래의 중봉(1875m)의 그늘에 가려 명성을 뽐내지 못하고 있는 게 하봉이다.
그러나 하봉은 그 산세와 빼어난 경관은 지리산 수많은 봉우리 가운 데 으뜸이다. 지리산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험준한 산세를 하고 있으며
그러한 탓에 아직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의 산세 를 이어 두류봉으로 연결시켜 산 아래 추성동마을 뒷산인 추성산성터에
이르기까 지 용틀임하듯한 하봉능선을 이루고 있다.
이 하봉능선의 웅장함은 직접 하봉능선을 등반하는 것 이외에도 남원시 산내면 삼거리(인월에서 뱀사골로 가다 실상사와 마천방면으로 나누어지는 삼거 리)에서
천왕봉쪽을 올려다보면 한눈에 볼 수있다.
마치 큰 산의 정기가 꿈틀거리 는 듯한 형세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봉능선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천왕봉 에서 중봉을 이어 추성동으로 하산하는방법도 있으나 이보다는 추성동에서 출발 해 정상을 향하는 게 더욱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물론 험준한 산세를 거슬러 오르 기 위해서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하봉까지만 등반했다가 국골 또는 얼음골을 통해 추성동으로 하산하거나 쑥발재 또는 치밭목산장, 조개골등을 통해 대원사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는
길이 열려 있어 무리하지 않고 등반할 수 도 있는게 하봉 능선이다.
추성동에서 마 을 뒷산, 국골과 얼음골 사이의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면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추 성산성터가 있는 영리봉이다.
하봉능선 등반의 묘미를 맛보기에 앞서 이곳 추성산 성터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봉능선의 등반은 추성산성터의 역사적 체취를 느끼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해 발 1432m의 두류봉을 향하는 능선길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등산로가 희미해 길을 찾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비교적 명확한 등산로가 나 있어
등산로를 찾는데 어려 움이 없다. 그러나 갈수록 높아지는 표고에 따른 급경사는 등반 초반부터 체력소 모를 요구한다.
한시간 30여분 동안 울창한 수림속의 힘든 산행을 하다보면 두류 봉이 나타난다.
잠시 사방을 살피면 멀리 지리주능선의 장관과 발 아래 골을 만들 고 있는 산줄기가 한눈에 잡힌다. 1백리 주능선의 이상적인 전망대라 할만한 위치에
솟아 있는 봉우리임을 알 수 있다.
천왕봉∼중봉∼하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은 지리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 는 암릉과 험준한 산세에 탄복할 정도다.
특히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중봉의 위용과 중봉∼하봉 사이의 깎아지른 듯한 산세는 일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여기 에다 칠선계곡과 국골을 빚어내고 있는 산세와 수림은 감동적이다. 더욱이 멀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연출하는 파노라마는
지리산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대개 산봉우리의 정상은 꼭대기 같은 여유와 충만감이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봉은 정상부근이 숲속터널과 아슬아슬한 바위벼랑뿐이며 더 높은 중봉 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봉"이 "하봉"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지리산의 하봉은 그 표고로 볼때는 결코 지리산의 낮은 봉우리가 아닌데도 낮다는 뜻의 하봉으로 이름지어져야 했는 지를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봉에서는 상봉인 천왕봉 은 중봉의 그늘에 가려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풍기며 더 높은 봉우리 아래의 봉우리에서도 정상 못지않는 여유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하봉 능선은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특히 하봉∼중봉 구간은 이 코스의 마 지막 절정을 맛볼 수 있다.
험준한 벼랑과 비탈을 가야하며 원시림의 울창함을 맛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구간 중간에서 등산로는 치발목산장으로도 연결돼 있다. 하봉능선의 등반은 대개 하봉정상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중봉을 거칠 경우는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충분한 일정을 세워 오르는게 바람직하다.
하봉까지 등반하고 국골 방면 또는 얼음골 방면등으로 하산하면 당일등반이 가능 하다.
이는 대략 6∼7시간이면 등반할 수 있는 짜릿한 등반코스이기도 하다.
"촛대봉"
시루봉에서 왼편으로 보면 세석고원의 광활함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아기자기한 암층을 따라 붉게 물든 철쭉을보면 촛대봉에 이를 수 있다.
촛대봉에서 보이는 세석의 묘미는 사뭇 대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듯 하다.
촛대봉은 고산대 특유의 황량함이 감도는 곳으로 붉그서럼한 철쭉꽃 봉오리들이 곧 철쭉의 향연임을 암시한다.
일명 세석골로도 구분되어져 불리는 골을 따라 시루봉, 촛대봉, 세석코스를 등반하는 묘미는 색다름을 느낄 수있을 것이다.
촛대봉 시루봉 구간에서 보는 천왕봉의 웅장함과 발 아래 도장골의 아름다움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토끼봉"
옛 물물교역 루트인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 화개재에서 남쪽계곡(칠불사계곡, 연동골)을 따라 희미한 길이 나 있는데 범왕일 목통마을에 닿는
이 길은 뱀사골산장 물품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 뱀사골계곡 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산장과 함께 샘터가 나온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점차 경사를 더해가는 힘든 길이지만 울창한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거닐어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4월말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진달래가 토끼봉 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듬직한 반야봉과 뒤쳐져 따라올 듯한 노고단이 훤하고 천왕봉, 세석,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연봉의 위용도 가관이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토끼봉 남쪽 능선길을 따라 20여 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은 울창한 수해를 이뤄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감있는 행보가 이어진 길이었다.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지난 1970년 7월경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 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게 흠인데 샘터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하다. 총각샘으로부터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나온다.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기듯이 오르면 차츰 완만해지다가 명선봉 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명선봉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烟霞泉)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천지에 온 듯하다.
"삼도봉"
우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라는 삼도의 큰 경계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경상남도의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개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의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 그리고 15개 면의 행정단위로 지리산은
그 구역을 구분짓고 있다.
그 광활한 지리산 자락은 또한 이들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단위에서 계곡과 산등성이를 기점으로 해 수많은 자연마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역할은 경계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러한 지리산의 특성을 단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산 봉우리가 있다.
바로 경남과 전남·북을 구분짓는 삼도봉(三道峯)이다.
반야봉 바로 아래 해발 1,550m로 지리산의 수많은 준봉 가운데 특이할만하게 눈에 띄는 봉우리는 아니다. 반야봉의 그늘에 가려 아주 이름없고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산세지만 지리산을 삼도로 구분하는 기점이라는데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삼도의 경계선은 대략 이러하다. 경남은 삼도봉-불무장대-통족봉-촛대봉-섬진강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능선을 경계로 해
전남과 구분되며 전북과는 삼도봉-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영원령-삼정산을 연결하는 능선을 경계로 하고 있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는 삼도봉-반야봉-도계삼거리-만목대-다름재 구간으로 이 경우는 능선으로 경계선을 만들다 계곡을 건너 다시 능선이 경계선이 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삼도를 나누는 삼도봉의 지명은 그동안 삼도봉이란 지명으로 불리지 못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 일원에 이정표를 세우면서부터 삼도봉으로 명명됐다. '낫날봉' '날라리봉' '늴리리봉'등 다양하게 불리던 이 봉우리가 삼도의 경계기점이라 해 '삼도봉'으로 명명되고 정착된 것은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낫날봉으로 불렸다한다. 낫날이란 표현의 발음이 어려운 탓에 등산객들 사이에선 '낫날봉'이 '날라리봉' 또는 '늴리리봉' 등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조금 천박한 느낌의 날라리봉 등보다 삼도의 경계기점이란 뜻의 삼도봉이 훨씬 어울린다.
삼도봉은 주릉의 서쪽면에 위치해 있으나 주릉을 조망하기에는 아주 훌륭한 망루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반야봉을 지척에서 음미할 수 있으며 멀리 천왕봉의 선경과 천왕봉에서 연하봉, 촛대봉을 잇는 천하제일경의 파노라마가 눈 앞에 선하고
남부능선의 아기자기함이 아스라히 다가오는 장관이 있다. 그리고 임걸령과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하다.
종주등반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봉우리이기도 하다. 삼도봉은 화개재에서 2km의 짧은 거리다. 또한 반야봉까지도 2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노고단까지는 8.5km 남짓한 거리로 삼도봉은 종주능선상의 요충지이다.
더욱이 반야봉 등반에 앞서 삼도봉과 반야봉, 그리고 삼도봉에서 노고단쪽으로 2km 남짓한 곳에 위치한 노루목등 세지점은 삼각형의 등산로를 연결하고 있다.
종주등반때 지리산 제2봉격인 반야봉을 '오르느냐' 마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대부분 장거리 산행에서의 산행 부담으로 반야봉을 생략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등장하기 일쑤다.
이는 반야봉을 오를 경우 4km의 산행을 추가해야 하는 반면 오르지 않고 삼도봉에서 노루목으로 곧장 향하면 그만큼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르지 않으면 반야봉의 절경을 느낄 수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노루목"이란 지명의 유래도 흥미롭다.
노루목이란 독특한 이름은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뜻도 있지만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가 이 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지켜들고 있는 형상의 바위 모양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삼도봉은 주릉상의 요충지면서 그 산세는 섬진강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 능선의 시발점이다.
그 지명에 걸맞게 경남과 전남을 구분지으며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삼도봉과 불무장등 능선은 삼도봉에서 해발 1,446m의 불무장대, 해발 942m의 황장산을 지나
촛대봉에서 잠시 솟았다가 화개장터 부근의 산자락을 끝으로 섬진강으로 잠긴다.
19번 국도를 가다보면 화개장터에서 피아골 입구 못미쳐 있는 검문소 부근이 바로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이다.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 능선은 경남쪽으로는 연동골과 화개골을 빚어내고 있으며 전남쪽으로는 피아골을 만들어내 모두 섬진강에서 하나가 된다.
삼도봉 가는 길은 주릉을 따라 거치는 것외에 연동골이나 뱀사골을 거쳐 화개재에서 잠시 쉬고 오르는 등산로가 있으며 반야봉을 오른 뒤 하산길에 들를 수 있다.
그러나 삼도봉을 목표로 하는 등산로는 연곡사에서 피아골을 따라 오른뒤 피아골 산장에서 용수바위를 거쳐 오르는 길과 불무장등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 손꼽힌다.
피아골 산장을 거쳐 용수바위를 지나 오르는 등산로는 산장에서 7km 남짓하다.
근대에 알려진 등산로로 산장을 지나 불토교, 용수바위를 거쳐 삼도봉까지 비교적 길이 잘 열려있다.
용수바위를 지난다 해서 용수암코스로도 불린다. 또 삼도봉-불무장등능선의 등산로는 연동골 입구인 목릉마을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으며 능선 너머
직전마을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등산로는 용수암코스보다 희미해 경험자와 동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령치"
해발 1,172m인 정령치(鄭嶺峙)는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이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만복대"
만복대(萬福臺) 만복대는 멀리서 보면 헐벗은 산같지만 억새로 뒤덮혀 있어 주변의 단풍과는 사뭇 다른 가을색을 보여준다.
지리산 서북릉에 위치한 1433m의 봉우리로 남원시 산내면과 구례군 산동면에 걸쳐있다.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100리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올만큼 조망이 빼어나다.
게다가 이 봉우리에서 고리봉(1248m)까지의 3km쯤에 이르는 능선에는 지리산에서 가장 드넓은 억새평원이 펼쳐져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지리산 횡단 관광도로가 지나는 곳에 있는 정령치 주차장에서 만복대까지는 걸어서 40∼50분밖에 걸리지 않을만큼 가깝다.
그러므로 만복대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보다는 광활한 억새밭과 초원이 길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고리봉을 거쳐 성삼재로 빠지는 것이 좋다.
정령치에서 출발하여 만복대, 고리봉을 거쳐 성삼재로 내려오는 이 코스는 총 산행거리는 7㎞로 3시간쯤이면 충분하므로 지리산까지 간김에 가벼운 기분으로
산행을 즐길만하다.
다만 11월초에 첫눈이 내릴만큼 기온이 낮고 바람도 매섭게 부는 곳이므로 두툼한 스웨터와 방풍복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억새산행 코스)
지리산의 여러 능선중 고리봉 (1천2백48m)~만복대 (1천4백20m)~정령치구간은 억새산행코스로 손꼽힌다.
"세걸산"
해발 1200m인 세걸산은 만복대에서 고리봉과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중간 쯤에 위치하여 지리산의 연봉을 한눈에 조명할수 있다.
그렇게 이름난 봉우리는 아니지만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둘째 가르면 서러워할 정도로 빼어나다. 특히 이곳의 억새는 그 어느곳 보다 장엄하고 아름답다.
천왕봉과 거리가 멀어 오히려 한적하고 조용하게 등산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삼아 등산을 원하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덕두산"
지리산이라고 하면 흔히들 천왕봉과 노고단이 연결된 지역을 이야기하지만 만복대에서 뻗어내린 덕두산에서 지리산을 시작하는것도 좋은것 같다.
덕두산~만복대~고리봉을 향해 노고단으로 향하는 갈대의 비경도 빼 놓을 수 없는 지리산의 한 페이지를 장식 하기 때문이다. 해발 1,150m인 덕두산은
동면 중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월과 중군리 를 등산 기점으로 등반할 수 있다.
"고리봉"
해발 1304m인 고리봉은 큰 고리봉과 작은 고리봉이 있다. 고리봉하면 큰고리봉을 말하는데, 일명 환봉이라 하며, 가을철 억새의 노란색과 은회색 그리고
참나무잎의 주황색 빛이 마치 스펙트럼 같이 보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주변의 등산 코스로는 광활한 억새밭과 초원이 길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성삼재로 빠지는 것이 좋다.
정령치에서 출발하여 만복대, 고리봉을 거쳐 성삼재로 내려오는 이 코스는 3시간쯤이면 충분하므로 지리산까지 간김에 가벼운 기분으로 산행을 즐길만하다.
다만 11월초에 첫눈이 내릴만큼 기온이 낮고 바람도 매섭게 부는 곳이므로 두툼한 스웨터와 방풍복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삼정산"
지리의 산릉은 S자 형태의 거대한 주릉을 중심으로 여러갈래의 지맥을 만들고 있는데 그 지맥 가운데 주릉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남부능선과
중북부능선이다.
두 능선 모두 주릉의 중간지점에서 시작되지만 서로 반대방향으로 뻗어져 흐른다.
두 능선의 공통된 특징은 각기 정반대를 지향하면서 지리 주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부 능선상의 삼신봉에 관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외지리(外智異)의 망루임에 틀림없고 중북부 능선의 삼정산은 내지리(內智異) 최고의 망루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남부능선은 잘 알려져 있으나 중북부 능선은 비교적 생소하다.
오히려 이 능선상의 삼정산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때문에 중북부 능선이라기 보다는 삼정산 능선 또는 독립된 삼정산 그 자체의 산줄기로 인식되기도 한다.
설악산은 흔히들 내설악·외설악으로 구분해 부르지만 지리산은 내외 개념을 잘 도입하지 않는다.
구태여 구분할 때는 주릉을 기점으로 해 내륙쪽과 해안방면을 구분해 내·외지리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내지리의 깊숙한 곳까지
그 진면목을 한눈에 가장 쉽게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중북부 능선상의 삼정산 정상이다.
하봉안부에서 중봉·천왕봉·촛대봉을 이어 반야선경·노고단·만복대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 처럼 연결되는 지리의 영봉을 가슴에 안아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리의 망루인 셈이다.
중북부 능선의 또다른 특징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숱한 불적들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지리의 선경과 지리산 천년 불교의 발자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능선이기도 하다. 중북부 능선은 남북으로 확 트인 화개동천과 만수천, 임천을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는 주능선상의 삼각봉에서 시작돼 영원령 삼정산을 거쳐 남원의 천년고찰 실상사 앞으로 흐르는 만수천으로 흘러내린다.
한쪽으로는 크고 널따란 망대골을 빚어내며 또다른 쪽으로는 와운골과 뱀사골로 흘러내리게 하는 능선이다.
이 능선은 또한 경남과 전북의 경계선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삼정산(三亭山·1,225m)으로 대표되는 이 능선은 전 구간을 답사할 수 있는 등산로보다 능선에 산재한 7개의 사찰과 삼정산 정상을 중심으로 한 등산로가
잘 발달돼 있다. 이 구간을 등반하려면 우선 마천면 삼정마을과 마천면 도마마을,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 등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정마을에서 벽소령도로를 따라 도솔암을 거쳐 삼각봉을 등반했다가 연하천 산장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이 능선의 등반이라기보다는 삼각봉과
연하천 코스로 인식할 수 있다.
불적 많고 전망 좋은 삼정산의 등반 묘미는 삼정마을에서 영원사를 거치고 상무주암을 지나 삼정산 정상에 오른 뒤 문수암·삼불사를 거치고 견성골을 따라
도마동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이상적이다. 반대로 산행을 해도 무방하다.
또한 등반목적이 불적답사일 경우는 삼정마을에서 도솔암을 향해 다시 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를 연결하는 등산코스를 한번쯤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비교적 많은 시간이 드는 만큼 조용한 산사에서 하루를 묵은뒤 계속 답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구간 능선과 불적을 잇는 등산로는 다소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하지만 암자측의 배려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삼정산 일원을 등반할 경우 음미해 봄직한 것은 즐비하게 이어진 불적들에 얽힌 유래에 관한 것들이다.
예사롭지 않은 창건일화를 갖고 있는 영원사(靈源寺)는 첩첩산중의 정남향으로 배치돼 있는데 공비토벌때 전소됐다가 70년대 후반부터 복원돼 지금은 겨우
사찰의 면모만 하고 있을 뿐이지만 불타기 전까지만 해도 100칸이 넘는 아홉채의 건물로 웅장한 규모였다 한다.
신라 경문왕때 금강산에 영원암을 세웠던 영원대사가 젊은 시절 8년의 토굴 수도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수도처를 옮기다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노인의 말을 듣고 다시 토굴로 들어가 2년을 더 수도정진한 끝에 마침내 득도(得道)해 영원사를 세웠다 한다.
영원스님의 하산을 막고 깨달음을 준 그 노인은 다름아닌 문수대성이었을 것이라는게 후세 스님들의 얘기다.
영원사가 창건된 이후로 수많은 고승 선객들이 수행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불교의 맥을 잇는 벽계정심 아래 서산·청매·사명·지안·설파상언·포광스님등
109명의 고승들이 안거, 수도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번창했던 영원사에는 이제 관음불상과 탱화, 6개의 부도등만 남아 영원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최근 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꼬불꼬불한 도로가
잘 닦여있어 차를 이용해 쉽게 오를 수 있다.
두채의 건물이 반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앞으로 편리한 교통편은 더많은 신도들을 모을 수 있어 또다른 번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여겨진다.
인근의 도솔암은 영원사의 속암으로 이곳은 영원사에 유명한 방광사리탑을 남긴 청매스님의 수도처로 유서가 깊다. 영원사와 함께 전란에 잿더미가 됐다가
최근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영원사에서 3km거리로 삼각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영원사에서 삼정산 정상으로 향하다 보면 정상에 못미쳐 삼거리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조금만 돌면 상무주(上無住)암자가 있다.
영원사에서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며 삼정마을에서 영원사를 거치지 않고 곧장 오를 수도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오랫동안 수도했던 곳으로도 알려져있는
상무주암은 사찰이라기보다 산중의 호젓한 별장같은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지눌과 혜심·무기스님의 불심이 깃들인 상무주에서 다시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걷다보면 문수암(文殊庵)이 있다.
볼품없는 작은 암자이지만 정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암자 뒤편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서편에 천인굴(일명 천용굴)이 있다.
임란 당시 마을사람 1,000명이 피난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다소 과장된듯한 규모이지만 결코 예사로운 바위굴은 아닌듯하다.
입구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가 퍽이나 인상적이다.
문수암에서 다시 10여분 걸어 내려오면 삼불사(三佛寺)가 있다. 비구승이 지키고 있는 삼불사는 산골마을의 고향집같은 느낌이 든다.
삼불사를 마지막으로 계속 이어지는 불적은 잠시 멈춘다. 견성골과 아래 도마마을 지나야 약수암을 거쳐 실상사에 닿는다.
"벽소령"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km에 달하는 지리산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 을 연결하는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 도로다.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에 높고 푸른 산능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벽소령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된양 착각을 하게 한다. 산이 낮고 구름이 주위를 뒤덮고 있어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벽소령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면 밤 하늘의 달이 아닌가 쉽은 생각이 든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다.
해발 450m인 여원치는 연재라고도 한다.
기원전 삼한시대 마한의 별궁이 있었다는 전설과 그 궁터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계곡 여원치(Yowonch'i) 마애여래불에 얽힌 여인의 정절에 대한 이야기,
호국혼의 전설을 간직한 아흔아홉 구비의 고개, 정상의 주지봉 산신단에 소원을 빌면 누구의 소원이든 한가지는 들어 준다는 수 많은 전설은
먹고 사는 곳이 바로 이곳 여원치이다.
여원치는 섬진강 상류가 있으며, 이 섬진강 상류를 끼고 남원시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그리고 여원치는 남원의 10경에 선정되어 있다.
(남원 8경)
구룡계곡, 여원치의 석양, 광한추월, 세걸산의 연봉, 교룡낙조, 반야봉 낙조, 만복대 갈대, 뱀사골 옥류와 단풍
"왕시루봉"
왕시루봉의 유래는 두가지 이다.
하나는 왕시루봉이 마치 시루를 업어놓은듯 반반하여 붙이진 이름이라하고
둘째는 문수골에서 영암촌 뒷골(이곳사람들은 이골짜기가 원래 문수골이라 함)의 능선에 있는 바위가 시루처럼 생겼다하여 왕시루봉의 이름이 되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