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주 명 철
상주일체 삼보
이러한 불타들은 한 개인으로서의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나무가 있다고 하자, 이 소나무 전체가 부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미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잎사귀의 세포 미립자 하나하나가 부처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생명, 살아 있는 일체의 것이 부처님인 것이다. 또 이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더 이상 부처가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썩어서 또 부처가 되고, 그래서 흙이 부처이고, 물이 부처이고, 불이 부처이고, 그렇게 지?수?화?풍 모두가 부처이다. 그 모든 것이 부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불타관(佛陀觀)이 여기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법당의 불상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하지만, 무엇이 우상숭배인가? 우상이라는 것은 어느 하나를 가지고서, 어느 특수한 물건을 가지고서 거룩하다고 그래야 우상이다. 불교에서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신성하고 거룩하다는데, 그것이 어떻게 우상숭배인가? 과거도 따로가 아니고, 현재도 따로가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시간으로도 쪼갤 수 없고, 방위로도 쪼갤 수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라는 말을 아주 실감나게 믿게 되는 것이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나는 이 말을 외우며 절할 때마다, 불상 앞에서 절하지만, 동시에 저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절하는 심정으로 절을 한다. 그러면서 그 생각이 얼마나 깊고 넓으냐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동시에 부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법이라는 것이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磨耶衆(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달마(達摩), 다르마(dharma)라는 것은 법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동시에 법이란 말이다. 법은 ‘진리’, ‘이치’란 말이다. 거기에 이치가 있다. 이치란 것은 무슨 철학책이나 종교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서나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다고 하는 법,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법,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고 하는 법,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 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법, 이것이 진리이다. 이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 똑똑히 보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 그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모습과 법의 모습을 ‘시방삼세 제망찰해’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보다 더 멋있을 수 없는,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있는 화합(化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가(sa?gha)를 번역한 승가(僧伽)라는 말이 화합이라는 말이다. ‘공동체’라는 말이다. 밤낮 마음속에서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러면서 겉으로만 억지로 좋은 척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진심으로 화합하고 있는 것이 우주의 모습이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자연을 파괴해서 물을 죽게끔 하고, 흙을 죽게끔 하고, 나무를 죽게끔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누구를 죽이고 있냐 하면, 부처님을 죽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동체의 어느 부분을 자꾸만 썩어 들어가게끔 하고, 우리 육신으로 이야기하면 어느 한 부분이 지금 암에 걸리고, 또 뭐가 걸리고 하는 식으로 자꾸 죽어 들어가고, 도저히 이제는 못 견디게끔 만들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체가 다 망가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어 가고 있다. 반성해만 한다.
불타와 달마와 승가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도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예경(禮敬)을 드리고, 칭찬을 하고, 널리 공양을 바치는 불 · 법 · 승 삼보는 비단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아는 첫 부처님이니까 이름을 앞에 둔 것이고,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계셨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실 것이다.
또 그 당시에도 시방삼세에 가득히 계셨던 부처님들, 그뿐 아니라 부처님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된 법, 부처님과 법을 따랐던 이상적인 화합의 공동체, 승가, 이 모든 것을 예경하고, 칭찬하고, 공양을 드리는 것이다. 불 · 법 · 승 삼보는 사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전체 시방삼세에 계신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모습, 또는 어떤 형상 이전에 어떤 본체적인 힘으로 계시던, 모든 형상의 근원이 되는 법신 부처님을 체(體)로 하고, 체에서 나타난 상(相)과 용(用)의 성격을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바로 불· 법· 승 삼보요, 우리는 사실은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예불문의 골격이다.
보살들
‘달마야중’ 다음에 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至心歸命禮 大智 文殊舍利菩薩 大行 普賢菩薩 大悲 觀世音菩薩大願本尊 地藏菩薩摩訶薩(지심귀명례 대지 문수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이렇게 보살들 이름이 쭉 나와 있다.
부처님 다음에 보살이다. 보살은 불 ? 법 ? 승 가운데 어디에 들어가 있을까? 어디에 넣어야 될까? 승가(僧伽)이다. 여기서부터 승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줄에는 보살들이 나오고, 그 다음 줄에 나오는 십대제자들, 십육성(十六聖), 오백성(五百聖), 독수성(獨修聖), 천이백제대 아라한(千二百諸大阿羅漢) 등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부터 먼저 내놓았다. 문수사리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이렇게 대표적인 보살 네 사람을 놓았다. 왜 이 보살들만 냈을까? 보살들 중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다른 이름들도 있을 텐데 …? 미륵보살이 안 나왔다. 그 대신에 지장보살이 나왔다.
중요한 것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선두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菩薩)을 줄여서 문수보살이라고 부른다. 문수와 보현은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보살로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은 보살들이다.
왜 이런 순서를 갖는 것일까? 먼저 문수사리 신앙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난 다음에 ??화엄경??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보현보살 신앙이라는 것도 먼저 있었던 것인지, 동시에 생긴 것인지, 그것도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임제록(臨濟錄)??을 읽다가 보면, 문수사리보살, 보현보살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문수보살이 어디에 있느냐? 문수보살은 ??화엄경??에서 오대산(五臺山)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에도 오대산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오대산이 있는데, 그런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웃기는 노릇이다.
??임제록??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문수보살은 네 마음속에 있다. 보현보살도 네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 지적인 특색을 가지고 나타날 때는 문수보살이고, 자비의 실천적인 특색으로 나타날 때는 보현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그런 마음가짐이 들 때, 보현보살이 발동했다고 한다.
문수보살은 무언가를 말고자 하는 탐구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경전을 보면, 경전에는 문수 계통의 경전이 있고, 보현 계통의 경전이 있다. 문수 계통의 경전에서는 주로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반야바라밀다를 강조한다. ‘지(智)’에 관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혜,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보현 계통의 경전에서는 실척적인 행(行), 보현행(普賢行)을 강조한다. '화엄경'의 ‘보현행원(普賢行願)’ 같은 것이 그것이다.
보현(普賢)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Samantabhadra(사만타바드라)를 번역한 것이다. ‘사만타(Samanta)’는 ‘보편적인’, ‘전체를 감싸는’, ‘두루두루’ 이런 뜻이고, ‘바드라(bhadra)’는 ‘공덕’, ‘복덕’이라는 뜻이 있다. 사만타바드라는 ‘보편적인 공덕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그러한 행을 실천하는 보살이 보현이다.
문수사리(文殊師利)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옮긴 말이다.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로 manju?r?(만주슈리)이다. ‘만주(manju)’는 ‘아름답다’, ‘오묘하다’ 뜻이고, ‘슈리(?r?)’는 ‘길상(吉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번역이 있지만, ‘묘길상(妙吉祥)’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만주슈리를 음으로 옮겨서 문수사리가 된 것이다. 아주 신비로운 지혜의 힘을 가진 보살이 문수사리이다. 석굴암에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조각이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불상이 있는 원형의 방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있다.
이렇게 문수와 보현이 예불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보살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문수와 보현은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강력한 화신(化身)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근본적인 생명이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부처로 바뀔 수도 있지만 보살의 몸으로 바뀔 수도 있다. 보살의 몸으로 바뀌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할 때에 지혜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을 문수보살이라고 했고, 자비행의 측면을 강조했을 때에는 보현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화엄경'에서 중요시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우리 예불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보살로 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 불타나 달마나 승가를 설명하면서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역시 '화엄경'의 사상과 관련이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예불문은 화엄경의 철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 '화엄경'이 유달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을 확인시켜 준다.
'화엄경'이 넓은 철학적 포용력을 지닌, 큰 스케일의 철학을 갖고 있다 보니까, 다른 모든 사상들은 전부 다 그 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과 달마와 승가라고 하는 삼보에 대한 해석이 싹 달라진 것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다음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이름이 나온다. 미륵(彌勒)보살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미륵보살은 빠졌다.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마음이라면, 미륵보살은 - 여기 미륵보살이 있다고 생각하면 - 대자(大慈), 자(慈)의 마음가짐이다. 자비가 두 가지로 나누어질 때, 각각 하나씩이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중생들의 의지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잘못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청하는 보살이다.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마하살’, 지장(地藏)보살은 지옥과 같은 세상 속에 남아 계시면서 지옥 중생들을 내가 꼭 건지고야 말겠다는 대원을 세웠다는 점에서 ‘대원본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흔히 의지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대지(大智), 대행(代行), 대비(大悲), 대원(大願)의 보살들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승가야중
그 다음 줄에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附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乃至 千二百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내지 천이백제대아라한 무량 자비성중)
‘영산당시(靈山當時)’의 ‘영산’은 인도의 왕사성(王舍城) 옆에 있는 영축산(靈鷲山)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그 밖의 많은 경전들을 설했다고 한다. ‘영산당시 수불부촉’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부처님으로부터 부촉(付囑)을 받았다는 뜻이다. 즉 “너희들에게 부탁을 하니 후세에 이 법이 잘 유포되도록 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부촉을 받은 것이 십대제자를 비롯한 사람들이다. 16성(聖)이라는 것은 열 여섯 명의 성자들인데, 16나한(羅漢)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과 같은 말이다. 16나한은 정법을 간직하여 지키기로 맹세한 16명의 나한들이다. 500성(聖)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모여서 부처님의 말씀과 승단의 규칙을 정리할 때 모였던 500명의 제자들이다. 500나한이라고도 한다.
독수성(獨修聖)은 혼자 수행한 성자들, 바로 독각승(獨覺乘)이다. 천이백제대 아라한(千二百諸大阿羅漢)은 사실은 1250인의 아라한인데 줄여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제자들이다. 경전의 시작 부분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시작하기 전에 법회에 모인 회중(會衆)들을 묘사하는데, 흔히 이 1250인의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승경전들을 설할 때에도 대보살들과 함께 동참을 했었다.
그리고 무량자비성중(無量慈悲聖衆), ‘그 밖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운 성자들에게’라는 말로 이 구절을 맺고 있다. 이 윗줄에서는 보살들이 나왔고, 여기서는 성문과 독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줄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재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서건동진(兩乾東震)’의 ‘건’은 인도란 말이고, ‘진’은 중국이란 말이다. ‘건(乾)’자는 인도를 가리키는 천축(天竺)이라는 말의 ‘천(天)’과 통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서쪽으로는 인도에서,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우리 해동(海東)에 이르기까지 역대전등(歷代傳燈) 제대조사 천하종사, 부처님의 진리의 등불을 전해 주신 모든 조사(祖師)와 천하의 종사(宗師)들이라는 말이다. 흔히 조사는 선종(禪宗)의 조사이고, 종사는 교종(敎宗)의 종사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헤아릴 수 없이 티끌과 같이 많은 모든 선지식들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줄에는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지심귀명례 시방상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이라고 했단 말이다. 나머지 승가의 사람들, 전부 다 일일이 이름을 부르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도 지심귀명례하고 있는 것이다.
자타일시 성불도
이렇게 하고 마지막으로 가서
唯願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라고 한다.
유원(唯願), 오직 원하옵건데, 무진삼보(無盡三寶), 다함이 없는 불 ? 법 ? 승 삼보는, 대자대비하셔서, 수아정례(受我頂禮), 우리들의 정례를 받으시고, 이마를 땅에 대고 예배하는 것을 받으시고,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 가피력을 쏟아 부어 주소서.
‘가피’는 은혜라는 말이다. 은혜를 남몰래(冥), 훈(熏), 향기가 스며들듯이. 우리들에게 스며들게 하소서.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원하옵건데 법계의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자타일시(自他一時),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동시에, 성불도(成佛道), 부처님이 되는 그 길을 이룩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예불이 끝을 맺는다.
이 예불의 의미를 알고, 예불하는 의식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실천하고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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