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행 이야기

용맹심으로 화두를

자공 우주 2008. 2. 5. 09:47

용맹심으로 화두를

 

혜암스님

상당上堂하여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치고 이르기를 이것도 옳지 못하고 할喝도 시방팔천리로다. 다시 할을 한번하고 일, 이, 삼, 사, 오, 육, 칠이라. 불법의 진리는 미묘한 것이다. 왜 둘 다 옳지 못하다고 해 놓고서 일, 이, 삼, 사, 오, 육, 칠이라고 하느냐? 누구든지 이 이치를 바로볼 줄 안다면 불조佛祖에게 속지 않으리라.


하루는 위산선사께서 제자 앙산스님과 함께 차밭에서 일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종일토록 차를 따도 그대의 소리만 들리고 그대의 모습은 들리지 않으니 그대의 본래면목을 보여 주게.” 이에 앙산스님이 차 나무를 자꾸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위산 선사께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대는 용用을 얻었을 뿐, 체體는 꿈에도 보지 못했구나.” 그러자 앙산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떻겠습니까.” 위산스님께서는 한참 동안 묵언하였습니다. 이에 앙산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체는 얻었을 뿐 용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오늘 그대에게 30방(棒)을 놓았노라.” 위산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두 분의 대기대용大機大用에 있어서는 죽이고 능히 살리며(能殺能活), 능히 따르고 빼앗기도 하며(能縱能準), 곳에 따라 주인이 되기도 혹은 빈賓이 되기도 하나, 본분사에 있어서는 입을 열면 다 그르친 것입니다(開口卽錯). 바람이 없는데 물결이 이는 것이요 살을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입니다.(天風起浪抗肉發月重)
이 일이 어떠한 것인고.

한참 묵묵한 뒤에 이르기를

흰 구름은 강 위로 가고 맑은 물은 바위 앞으로 흘러 내려가더라.
白雲江上去只 綠水岩前來多

마음 말(번뇌망상)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뛰어 달아남에
잡아오고(화두로)잡아와 또 잡아와서
이 같이 오래오래 날이 오래 깊어지면
잡지 않아도 스스로 와 눈앞에 있으리라
비로소 이 같은 경계에 이르게 될 때
뜻밖에 본원 자성을 깨닫게 되리라
옆 사람이 마음 있는 곳을 묻는다면
달은 하늘 복판에 이르렀고 밤은 삼경이로다

공부도 하지 않고, “어째서 화두가 이렇게 되지 않느냐”고 물으러들 옵니다. 언제 공부했습니까. 공부는 거짓이 없어요. 공부가 안 되었을 때는 반드시 본인들에게 허물이 있을 뿐입니다.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망상은 망상대로 다 피워 놓고, 부끄럼 없이 공부가 안 된다고 물으러 옵니다. 예전의 깨친 분들은 한 사람도 그렇게 않았습니다. 공부에 몰두해 하늘을 봐도 하늘이 아니고, 땅을 봐도 땅이 아니고 사람을 봐도 사람이 아니게끔 해야 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인 것 같아도 마음은 하나밖에 없어요. 화두 하나만 잘 들면 분별심이 없으므로 들어도 듣지 않은 것과 같고 보아도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없이 공행空行을 닦으라는 것이 아닙니까. 밤낮이 언제인지 모르고 공부해야 해요. 아침엔 너무 이르니 때를 맞추어 공부해야겠다고 하지 않고 밤이니 쉬어 자야겠다고 안 하고, 단 한번, 단 한철만이라도 자는 것, 먹는 것 돌보지 말고 공부해 봐요. 오래 한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전라도 선운사 어느 대처 스님은 방부를 들여 ‘무자’ 화두를 들고 한철 만에 깨쳤어요. 살림하러 갔다가 저녁 늦게 입선시간에 달라들어 대중들의 미움을 받았는데, 공부하는 것을 보면 미친 사람 같아요. ‘무, 무’ 하고 스리 지르며, ‘어째서 무라 했느냐’ 하며 방바닥을 내리쳤어요. 그렇게 하더니 한철만에 깨치고 조실로 갔습니다.


오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자라고, 첫철 나러 왔다고, “나는 못합니다” 하는데, 그런 데에 속지 말아요. 일 주일 만에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작정해 버려요. 이런 용맹을 가지고도 시원찮은데, ‘되는 데로 하자’ 해서야 되겠어요, 망상이지.
비유하자면 열 근짜리를 들어야 성불인데 한 근도 들 힘이 없단 말이예요. 업장이 중하고, 도에 약하고, 법력이 없어 밤낮 도둑놈 한테 속고 몰리고 덮어 씌어 공부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애쓰는 것이 공부이지, 다른 게 없습니다. 천 사람, 만 사람 찾아 다녀도 다른 비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들어 보면, 화두가 안 들리니까 화두를 드는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피고 있어요.


이 세상 범(공부)과 달라 재미도 없고, 답답하고, 알래야 알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 탁 대고 약한 부리로 혈통을 뚫듯 신심, 용맹심 하나 가지고 바늘 끝을 날까롭게 해 그 자리를 뚫어야 합니다. 하늘도 땅도 없어지게끔 의단 하나만 가지고, ‘이 뭣고’ 하기 전에 의단이 한덩어리로 꽉 차 버린단 말이예요. 이렇게 안 되니까 되도록 조직을 부려 할 수 없이 방편으로 가르쳐 주자면, 죽은 송장처럼 화두가 없어질 때까지 ‘이 뭣고, 이 뭣고’ 해요. 선암사 스님이 ‘어째서 무라 했느냐’ 하면 방바닥을 두드리는 식으로, 그렇게 화두를 놓치지 말고 잡아요, 그러면 그것이 익습니다.

이것이 주공법做工法이라 해요. 참다운 진의가 나오지 않으니까 조작해서라도 애를 쓰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참다운 의심이 나면 일 주일도 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나 조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밤낮 이렇게 결제만 하러 다니면 뭐합니까. 먹는 빚, 입는 빚, 빚만 지는 겁니다. 공양주도 해 보고 주지도 해봐야 먹고 입는 은혜를 압니다. 공양주도 안 해 보고 선방만 다니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예요. 고생 좀 해 보고 선방을 다녀야지 편안히 중노릇 하다가 선방에 가니 ‘이 뭣고’ 가 되겠어요. 편리주의로 남의 신세만 지려고 할 게 아니라 만들어 가지고라도 고생을 좀 해야 해요. 자기 허물은 돌아볼 사이없이 남의 허물만 돌아봅니다. 평생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어 아니까 자신 있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대관절 이 세상에 무슨 수월한 일이 있느냐 말입니다. 스님네들도 해 봤지만 공양을 제공하는 것도 수월합니까. 날마다 그런 빚을 지고 살면서 어째서 어름해 가지고 용맹심을 내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참선 공부하는 법을 비유해 말해 보겠습니다.
산중에 황금으로 된 소가 한 마리 있는데, 이 소를 잡아 내면 행복하게 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첩첩산중에서 소 발자국의 흔적을 발견한 뒤 발자국을 좇아가다가 소를 만나면 잡으러 좇아가는데, 잡으러 가는 사람도 힘들지만 쫓겨 가는 소도 불리하여 은신처를 구하다가 필경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돌아서 최후로 발악할 때, 상대편에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용맹정진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 견성법입니다. 곧 화두당처話頭當處가 소의 발자국인 동시에 불성 자리입니다.


황금소를 억압으로나 선업으로 잃어 버려도 결국에는 생사를 면치 못합니다. 예를 들면 송아지를 잡아야 항복 받고 자유 생활을 할 터인데, 노름이나 외도처럼 나쁜 일을 하다가 소를 잃어 버리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살려 주다가 곧, 좋은 일을 하다가 소를 잃어 버려도 결과적으로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일에 속아선 안 돼요. 세상일은 거짓으로 멋지게 연극하고 모든 반연을 끊어요. 착한 일도 옳은 일도 그른 일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이 뭣고’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또 만나기 어렵습니다. 천하를 돌아봐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도, 문수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나를 도와 주지 않습니다. 내 죄는 내가 풀어야지 의지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니 후회 말고 운수납자가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크게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야 합니다.

여래의 청정법신을 비방하지 마라.
화탕지옥에 갈 것을 모르느냐.
혹시 어떤 사람이 욕하는 가운데 뜻을 알면
화탕지옥이 홀연히 연꽃 몫이 되리라.

2538년 음 4월 29일 해인사 대적광전 상당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