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행 이야기

대의심(大疑心)

자공 우주 2008. 2. 5. 09:50

대의심(大疑心) ①

근원에 대한 ‘끝없는 물음표’가 생명

간화선에서 말하는 의심은 누군가가 미심쩍어 의심한다는 그런 의심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으키는 일종의 근원적인 의문 부호다. 그렇지만 끝내는 알고 싶고 풀고 싶어 하는 갑갑함이 서려 있다.

 

<수행은 인간 본연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이다.>

 

말과 생각의 지평에서 궁극적인 진리는 파악할 수 없다. 사물 자체의 본질이라든가, 나 자신, 너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생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물며 우리가 수학이나 물리의 세계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가설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볼 때, 우리가 사용하는 이성을 통해서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결코 드러내놓지 못할 것이다. 설사 물리의 세계에서 찾아진 진리라는 것도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뉴턴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다.

 

“네가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그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따금 다른 것들보다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유달리 예쁜 조개껍질을 찾아내곤 기뻐했으나,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전혀 밝혀진 것이 없는 채로 내 앞에 놓여 있다.”

 

말과 생각으로는 진리 파악 한계 있어

화두로 간절한 의심갖고 살면 값진 삶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에서도 이러한데 삶과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철저히 무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묻기 이전에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존재다. 의문이 가득한 존재다. 도대체 알 수가 없고 신기하기 때문이다.

 

화두란 무엇인가. 전에도 언급했지만 화두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본래 부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삶과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 그 세계를 보여주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 본래 부처의 마음, 삶의 실상인 공(空)은 말과 생각으로는 파악 불가능이다. 그런데 화두는 말 길과 생각의 길을 끊고 바로 그 자리로 들어간다. 화두가 지니고 있는 철저한 의심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이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던지는 존재이고 그 의문을 풀고자 갑갑해 하는 자이기 때문에 누구나 화두를 들고 있는 셈이지 않는가? 인간이란 본래적으로 화두를 가진 존재이지 않더냐? 그러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간화선 수행자가 아니더냐?

논리의 비약인지 싶겠지만 사실 그렇다고 본다. 단지 우리가 불문에 귀의해서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그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종교적 틀일지라도 화두를 들고 거기에 간절한 의심을 품고 수행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화두로 간절한 의심, 근원적인 의심을 마음속에 품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피며, 부처님의 생명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값지고 좋은 일이다. 우리가 화두를 드는 순간,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는 순간, 내가 본래 그 자리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생각을 해 보라. 진정 가슴 떨리는 사건이지 않은가!

 

대의심(大疑心) ②

오직 자신만이 풀수 있는 ‘가슴에 있는 의문’
화두 들고 억지 의심하면 오히려 병

역대 선지식 화두수행 통해 길 안내

 <사진설명> : 참선 수행에 든 스님들.
 
인간은 근원적인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의문이다. 부처님도, 아무리 위대한 성인도, 역대 조사들도 그것은 해결해 줄 수 없다. 그 열쇠를 푸는 것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직접 물을 마셔봐야 그 물이 뜨거운지 찬지 스스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다행인 것은 역대 선지식들이 화두 수행을 통해 그 열쇠를 푸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자들은 화두를 제시해 주고, 거기에 대해 어떤 해답도 주지 않은 채, 가슴에 하나의 큰 의심을 품게 하여 깨침으로 인도해준 스승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느냐고 고백한다.

그런데 현재의 문제는 화두에 의심이 걸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화두를 들고 억지로 의심하니 오히려 그것이 병으로 도진다. 그래서 커다란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왜 중요하며 그것이 왜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근세 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를 보자. 이 철학자로 인해 지구상에서 이성을 중심으로 한 철학과 자연과학이 새롭게 기지개를 편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본격적으로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그의 역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으며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너무나 이성을 절대화하고 이성을 신봉한 것이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자기 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현상은 꿈일런지 모르겠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유명한 언명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나’라는 주체가 ‘어떤 대상’을 객관화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내 주관의 선입견을 떠날 수가 없으며, 내 생각의 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심은 나와 세계의 모든 것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의문 부호화하는 철저한 의심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와 세계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을 커다란 의심이라 한다. 커다란 의심은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의심 하나만 또렷하게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이 의심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이 삼매가 되어 화두를 들고 화두 삼매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매로서의 의심은 내가 생각의 틀로 무엇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철저히 죽어 없어지고 의심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화두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의심이 간절해지면 내가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다란 의심이란 화두에 조그마한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의심을 말한다. 말과 생각의 흔적, ‘나’라는 흔적은 철저히 무가 되는 것이다. 의심이 간절해야 어떠한 강렬한 자극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계에 부딪혀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화두를 드는 데 자그마한 의심이 따로 있고 큰 의심이 따로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화두를 들 때는 조그마한 생각의 자취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큰 의심이다. 다만 그러한 의심이 마음속에 얼마나 간절하게 달구어져 있느냐, 얼마나 빈틈없이 이어지느냐에 따라 큰 의심이다 작은 의심이다 할 뿐이다.

아주 크게 의심했을 때, 즉 대의(大疑)가 철저하게 드러났을 때, 기연을 만나 화두가 타파되면 중생 놀음하는 분별의식이 소멸되고 본래 부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선사들이 깨닫는 계기는 모두 이 대의가 역력하게 현전했을 때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가.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닫는다. 크게 의심하여 내가 철저히 죽어 없어지는 순간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가 바로 천하를 독보하는 ‘나’ 다.” 
 
조계종 포교연구실